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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IRS OF THE ROUND TABLE
원탁의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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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바람에 하얀 입김이 부서진다. 찬바람이 폐 속까지 파고들어 온기를 훔쳐 달아나니 속마저도 시렸다. 체어맨은 웃옷을 더 걸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몸을 살짝 부풀렸다.
특이하게도 나무 의자를 끈으로 묶어서 지게처럼 짊어진 그는, 겨울 산의 등산객이라기엔 멀끔한 정장을 입고 있었다. 구둣발로 터덜대며 걷는 꼴이 퇴근길의 샐러리맨과 퍽 닮았지만. 옷차림에 비해 다듬어지지 않은 머리카락이나 수염이, 그를 신사보단 떠돌이 나그네에 가까워 보이게 했다.
"클랜 성은 아직도 멀었어? 거 되게 머네~"
검은색 원형 의자에 매달려 동동 떠 있는 작은 아이가 그의 옆에서 투덜거린다. 애초에 허락한 적 없는 동행이었으나, 아이는 체어맨의 의사는 가볍게 무시하곤 계속 쫓아왔다. 아마도 일방적인 질문 세례에 엉겁결에 꺼낸 클랜 얘기가 실수였을 것이다. 체어맨은 작게 한숨을 쉬며, 뒤통수를 긁적인다. 원체 미동 없는 표정과 더불어, 선글라스에 가려진 얼굴 덕에 그의 감정이 잘 드러나진 않았으나, 이 말썽꾼 덕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 건 확실했다. 자신을 폴터가이스트라고 소개한 요 철부지와의 만남은, 지금도 그렇지만 그다지 좋은 추억거린 아니다.
ㅡ ㅡ ㅡ
나른한 햇살이 살짝 기운다. 머리 위의 해가 그림자로 베를 짜기 시작할 즘 체어맨은 묘하게 뒤통수가 찜찜한 느낌을 받았다. 사람의 기척이라기엔 희미한 데다, 여긴 민가에서 한참은 떨어진 숲이다. 아마 겨우내 배고픔을 못 이기고 기어 나온 산짐승일 가능성이 크다. 솔직히 귀찮은 마음이 더 큰 체어맨이었으나, 이때까지의 경험상 이런 감각은 무시해서 좋은 일은 없었다. 체어맨은 손안에서 굴리던 브로치를 그러쥔다. 행상인에게 강매당한 걸 이렇게 쓰게 될 줄이야. 손마디에 단단히 힘을 준 그는 돌아보는 원심력을 이용해 브로치를 던졌다.
"아악!"
"...?"
체어맨의 예상과 달리 그 희미한 기척은 사람의 것이었다. 그것도 그보다 한참은 작은 체구의 여위고 수척한 아이. 사실 곁에 널브러져 있는 뜬금없는 검은 의자(물론 본인도 의자를 들고 다니지만)하며, 오간 발자국이 전혀 없는 것까지 추궁하고 싶은 점은 꽤 있었으나...
"아프잖아! 수염 난 아저씨야!!"
초면부터 윽박지르는 아이의 분노에 전부 잊혔다. 시퍼렇게 멍든 왼눈을 보니 상당히 아플 법도 한데... 아픔은 뒷전인 듯 제 할 말부터 쏟아내는 모습이 제법 당돌하다. 한바탕 짜증을 내던 아이가 이제야 진정이 됐는지 일어난다. 여기까지였다면 이 만남은 그저 헤프닝 정도로 끝났을 것이다. 아이의 주머니에서 툭 하고 낯익은 물건이 떨어지기 전까진.
"...이건 내 지갑인데."
짧게 혀를 찬 아이의 손이 허공을 가르자, 섬찟한 바람이 체어맨의 머릴 스쳐 지나갔다.
'콰지직'
뒤를 흘겨보니 파열음의 진원지에 있던 나무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작살이 났다.
잠깐 눈을 뗀 사이 아이는 검은 의자에 앉아 공중에서 가만히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이의 주위에 불길한 초록빛 불길이 일고, 눈에서는 흉흉한 보랏빛 안광이 돈다.
체어맨은 일단은 매고 있던 의자를 빼 들어 곧장 전열을 갖춘다. 오늘따라 일진이 사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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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허공을 사선으로 긋자, 주위에서 일렁거리던 희끄무레한 연둣빛 투사체들이 일제히 체어맨을 향해 발사된다. 체어맨은 정직하게 날아오는 투사체들을 의자를 횡으로 휘둘러 흘려 쳤다.
궤도가 틀어진 투사체들이 그대로 숲 바닥을 강타해 솟아오른 흙과 눈이 잠시 시야를 가린다.
생각보다 타격이 묵직해 의자를 쥐었던 팔이 저리다.
그는 의자를 고쳐잡으며, 심호흡을 내쉬었다.
'파사삭! 쾅!! 파삭!'
시야가 걷히자마자 공격이 쏟아진다.
체어맨은 의자를 크게 휘둘러 쳐내고 옆으로 굴러 회피했다.
공격을 쪼갠 탓인지 아까보단 가벼워졌으나 저 희미한 가스불 같은 투사체들이 문제다.
타격과 동시에 터지며 전신에 뒤집어썼는데, 뜨겁진 않았으나 오한이 들 만큼 춥고 몸이 무겁다.
체어맨의 상태와 별개로 아이는 불안한 듯 손톱을 계속 물어뜯었다.
빗나가면 빗나갈수록, 막아내면 막아낼수록 손짓은 커졌으나, 위력과 명중률은 더욱더 형편없어졌다. 아무리 상성이 있어도 제 능력도 가늠 못 하는 아마추어에게 질 리가 있을까.
체어맨이 아이를 향해 의자를 내던진다. 아이는 황당하다는 듯 손짓으로 튕겨내었다.
그러나 그 짧은 틈에 도약한 체어맨이 아이의 팔을 잡아 끌어내렸다.
맥없이 떨어져 제압된 아이는 저항하지 않고 그저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그를 노려보았다.
다시 봐도 아이는 무척 앳돼 보인다. 그러나 분위기는 임종을 앞둔 노인의 안색과 같았다.
이런 몸으로 능력 하나 믿고 자신에게 덤빌 생각을 했던 건가.
참 겁이 없는 건지, 대담한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이거 놔!!"
아이가 악을 쓰며 발을 올려 찬다. 가만히 있다가 턱을 얻어맞은 체어맨이 아이를 지긋이 내려다본다.
순간 미간이 찌푸려진 것도 같았으나, 미동 없이 턱을 매만질 뿐 그다지 타격은 없었다.
조금 전 당돌한 꼬마는 어딜 갔는지. 약하지만 미세하게 떨고 있는 것이 보인다.
체어맨이 아이를 향해 손을 뻗자, 지레 겁을 먹은 아이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만 좀 하세요."
딱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얼얼해진 이마를 문지른다. 아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체어맨을 보았다. 딱밤을 맞아 눈물이 찔끔 날 만큼 얼얼한 이마와 별개로, 고개를 숙여 자신과 눈높이를 맞춘 그가 매우 어색했다.
"왜 이런 짓을 한 겁니까?"
"..."
"아니면... 누가 시킨 겁니까?"
"...누가 시킨 거 아냐. 그냥 돈이 필요했어."
"그건 안타깝네요. 이쪽도 빈털터린데."
체어맨은 먼지만 들은 텅 빈 지갑을 탈탈 털어 보여 준다. 아이는 허탈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뭐야? 겨우 빈 지갑 때문에 그렇게 싸운 거야??"
"전 처음부터 제압만 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도둑질이 그리 떳떳한 행동은 아닐 텐데요."
"쯧! 아저씨도 나한테 이거 던졌잖아. 쌤쌤으로 쳐줘."
체어맨의 발치에 떨어진 브로치를 눈짓으로 가리킨다. 애초에 도둑질하겠답시고 체어맨의 뒤를 밟지만 않았어도 이럴 일은 없었겠지만. 체어맨은 귀찮았는지 그냥 넘겼다.
"아저씨."
"뭡니까"
"이왕 봐준 김에 조금만 더 도와줘. 아까 아저씨가 내 팔 잡아당길 때 팔이 빠졌어."
"..."
"양쪽 다."
"이런."
우드득 하고 뼈 맞추는 소리와 단말마가 숲을 지나갔다.
훌쩍거리면서도 익숙하게 바로 팔을 휙휙 돌리며 확인하는 걸 보니, 자주 이런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이를 보던 체어맨이 일어나서 의자를 끈으로 묶어 등에 진다.
보아하니 다시 덤빌 것 같지도 않고,
엉뚱한 곳에서 시간을 더 지체하기 싫었던 체어맨은 다시 갈 길을 재촉했다.
부스럭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소리,
그리고 기울어진 해가 남긴 작고 긴 그림자가 허락 없는 동행을 알려주었다.
.
.
.
"저기 아저씨. 아저씨는 이름이 뭐야?
내 이름은... 음, 그래. 폴터가이스트 그게 낫겠네. 대충 폴터라고 불러."
"...체어맨입니다."
침묵을 깨고 입을 연 쪽은 아이였다. 갑작스러운 통성명에 체어맨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이상한 이름이네. 그냥 아저씨라고 부를래."
"대체 뭐하러 물어본 겁니까? 폴터."
어깨를 으쓱이며 키득대는 철부지의 표정엔 호기심과 장난기가 가득 서려 있다. 여간 심심했던 모양인지. 동동 떠 있는 의자에 앉아, 체어맨 주위를 빙빙 돌며, 이런저런 질문 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근데 아저씨 굳이 그렇게 차려입고 수염은 안 민 거야? 뭐, 우리 아빠도 면도 깜빡할 땐 많지만... 아저씨 정돈 아니었는데 말이야."
대체로 단답으로 끝날 의미 없는 질문들이었으나, 특히나 집요했던 건 그의 행색(주로 수염)에 대한 질문이었다.
"...안 그래도 그걸로 동료에게 한 소리 듣고 오는 길이니, 수염 얘긴 이제 그만하죠."
적당한 단답으로 질문들을 넘기던 체어맨이 결국 한마디 한다. 턱을 매만지는 그가 어째 피곤해 보인다. 생각보다 여러모로 시달렸던 모양이다. 한편 폴터는 체어맨의 말에 다시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동료? 아저씨 동료도 있었어?"
이 질문을 기점으로 체어맨은 폴터의 오만가지 잡담과 질문들에 시달려야 했다. 조용해진 것은 조용히 하면 클랜에 가입하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후였다.